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할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닿는데까지 한번 밀어붙여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발갛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싶은 것이다
연탄 한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듯이
연탄은, 일단 제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에필로그>
참으로 지루하고도 재미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 그의 눈속을 들여다보고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알게 되는 일,
그 사람이 나와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될지를 가늠해보는 일.
그것을 글로 남겨두고 싶어서 '후기'라는 것을 쓰게 되었거든요.
첨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타인들이 내 글을 읽어주고 느낌도 말해주었으며
잘쓴다, 재미난다, 또 써달라.. 라는 말을 듣게 되니 참말 기분이 상큼했습니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것에 상품권을 보내주지 않나, 업주들과 매님들이 내 닉넴을
다 기억해주질 않나.. ㅇ ㅏ.. 후기를 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더랬지요.
그리고 다시 곧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그들에겐 장사의 수단이었고, 내게 보내주던
찬사는 그저 빈말이었으며, 나는 그 허둥장단에 맞춰 춤이나 춰대는 꼭두각시였음을요.
그래서 후기를 쓰지 않기로 맘먹습니다. 후기 따위 남기지 않아도 언제든 즐달은 가능했고
닉넴 따위 없어도, 늘 그래왔듯 닉드립, 후기드립 칠 일이 없기에 아무 상관 없을거라고.
허나, 나도 모르게 거기에 물들어 있었던 탓이었는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패턴 역시도 허무한.. 그저 시간 때우기에 지나지 않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알아가면 갈수록 후기는 색깔을 달리합니다.
마치 정글에서 주위의 환경에 따라 변색하는 카멜레온처럼, 푸른빛도 띄었다가 때론 붉어지기도,
덤덤하니 탁하기만한 회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새하얀 색으로 탈색되기도 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달하고픈 마음보다는 내 스스로가 하얀 캔버스가 되어
내가 만나보았던 그녀들의 색깔을 형형색색 채워넣고 싶었던 욕심이 컸었던 것 같아요.
그 무렵, 내 캔버스에.. 정해진 공식을 강요하는 곳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사가 몇개쯤 있어야 하고, 너무 솔직한 내용은 적을 수 없으며, 업소에서 싫어할만한
또는 그녀에게 데미지를 줄만한 잠재적인 위험요소들은 언제든 배제해야 하는 규정.
그것이 글쓰는 이의 손끝에서 스스로 이루어진다면 참 보기도 좋고 읽기도 기분좋을 일일텐데
아쉽게도 그런 자가정화의 기능을 요구하기엔 너무나 다양하고 각기다른 사람들이 글을 쓰는터라
굳이 가두리를 만들어.. 먹이도 줬다가, 때론 몰아서 구석으로도 넣었다가.. 항상 관리하는데에만
치중하는 모습이 - 꼭 필요한 일임을 잘 알면서도 - 그만 싫어져 버리더군요. 그랬습니다.
"후기는 양날의 검이다"
라는 고수님들의 얘길 들으며 저 역시 험난한 초보미생의 길을 걸어온지 벌써 햇수로 5년.
이젠 그 후기라는 것이 단지 엔엡이나 복귀한 분들을 위한 찌라시일 뿐이구나.. 라는
혼자만의 개똥철학마저 품게될만한 짬이 되었습니다. 가끔 영혼을 담아, 가슴꽉찬 감성을 실은
그녀와 나의 이야기를 후기로 써주시던 분들도 요즘은 거의 사라진듯 하여 더더욱 마음이 황량합니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양날의 검의 역할은 이미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고 그저 찌라시, 그게 아니라면
겨우 이 바닥에 금방 입문한 초보분들에게나 장단점을 동시에 맛보게 해줄 수 있는 제품설명서 정도랄까.
그건 아마도 후기를 대하시는 분들의 마음가짐도 그러하려니와 쓰는 분들 역시도 영혼 따윈 저멀리..
후기 할인을 위해, 내 달림의 자랑을 위해, 업소와 매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등등
보여주는 글자로는 '자신의 달림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함이지 일절 다른 욕심없다' 라고 써대면서
막상 후미에서는 추천과 관심, 댓글은 성실한 품앗이로.. '난 듣보잡이요' 라면서 유명닉이라는 얘기 듣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치로.. 정작 후기에는 좀더 화려한 실사 외에는 아무런 감성도, 느낌도 없는 말장난 뿐.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가독성을 위해 많은걸 버릴 때도 있었고, 좀더 자극적으로
일부러 꾸밀 때도 많았으니까요. 그게 맞는게 아니라는걸 알면서도 그랬습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었나봐요. 원래 내 후기란 것이 정말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가끔이라도 내 후기를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신다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정말 신기할 정도로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랬으니까요. 아주 소수의 분들이었고, 취향이 확실하고 곧은 분들이었습니다.
이 글을 빌어 그 몇 안되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나의 입문 당시부터 지금까지.. 적지 않은 시간들을 격려와 응원으로 채워주신 고마운 분들..
언제, 어디서나 잊지 않겠습니다. 그대들 덕분에 제가 여태껏 버틸수 있지 않았었나 싶습니다.
다시 심심하기 짝이 없는 길을 걸어가려 애써봅니다.
한줄을 쓰든, 백줄을 쓰든.. 정말 내가 하고팠던 말들과 내가 좋아하는 그녀와의 이야기,
내 부족한 내공을 담아 소신껏 그대들에게 반드시 주고싶은 영혼의 언어들만 쓰겠다 다짐합니다.
후기란 이런 것..? 정답은 없습니다. 왕도도 없고 지름길도 없더군요.
마치 달림에서 랜덤을 타는 것과도 마음가짐이 같아야 할거라고 혼자 키득거려봅니다.
달림도 그렇고, 후기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습니다.
크게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네지 않으면 상대방이 알수 없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화려하다고 해서 그 글이 화려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수수하다고 해서
반드시 초라한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자신이 말하고픈 것을 얼마만큼 설득력있게,
진심을 담아 말하느냐가 가장 관건인듯 합니다. 요즘은 더욱 그렇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아요.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게 되는 일이 두려워
그 누구에게도 뜨거운 사람이 되지 못했노라며 가슴 두드려 한탄하면서 지난 날을 회고할 뿐이겠지요.
이처럼 안도현님의 연탄 시리즈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깟 유흥이 뭐라고 여기 매달려있는
그대들과 나, 자칭 놀이터랍시고 온갖 몸장난과 말장난질을 일삼는 우리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던지네요.
나를 산산이 으깨어야 비로소 삶의 윤곽이 보이듯
사람과 사람이 알게되는 일도, 서로 소통하며 가까워지는 일도, 그러다 한발짝 다시 물러서서
처음과 끝을 되짚어보는 일련의 과정들도 역시나 다르지 않은 것임을 홀로 느끼는 밤입니다.